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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정엄마 공연순여사


공주사 4녀2남중 둘째딸 우리엄마 공연순여사

4남1녀를 두고도 나이 40세에 늦둥이 나를 낳았다 

병약하던 엄마는 나를 낳고 절로 요양을 갔단다

젖이 모자라 백도 황도를 먹고 자랐다는 나

우리엄마 나 우리딸들 모두복숭아 대장이다




창경궁식물원ㅡ그 당시 흔치않던 칼라사진

서너살정도 되었지 싶다



45세에 막내딸을 얻은 아버지 신 용철님




집앞마당에서 언니와 나

딸이 귀하던 집안의 두 딸들 




돌사진ㅡ나를 길러준 수원이모와 언니와

수원이모는 청상으로 엄마 대신 나를 길러준 분

내가 아주 크도록 우리집을 찾아오면 늘 내편을 들어주고

이마와 귀가 잘생겼다며 늘 이마와 귀를 쓰다듬어주었다

나의 주양육자였던 수원이모의 절대적인 사랑으로 

나는 커서도 어떤 역경에도 주눅들지 않고 당당한 마음가짐을 가지고있다



 


서대문 네거리 한옥마을에서 자란 나는 그 골목골목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침밥 먹고나면 온동네가 놀이터였고 온갖 놀이로 해지는줄 모르던시절

대청마루 뒷물을 열면 태환이네 부엌 뒷마당이었고 태환이네와 우리집은 담없이

그 문으로 들락거리며 친하게 지냈었다

 

은행에 다니던 아버지가 퇴직을 염두에 두고 투자했던  퇴직금이 사기로 한방에

날아가 우리가 한옥집을 팔고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적에 선듯 그당시 5만원을

빌려주었던 태환이네 부모님.

언젠가는 그 돈을 나라도 갚고 싶어서 태환이네가 이사갔던 이대랖을 찾아갔으나

 이대앞은 재개발로 아파트로 변해있었고  태환이네는 찾을수 없게되었다

 


 


서대문 옆집태환이와 태환할머니-창경궁에서





엄마와 서대문 친목계원들의 창경궁나들이






서대문집 툇마루에서 부모님과 당고모 용산아주머니

아직도 눈에 선한 서대문집 저 툇마루

그당시의 아녀자들의 복식은 한복이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배려심과 조신함과 늘 당당하고 당찼던 우리엄마


대문을 열고나오면 축대가 있었고 해병대 휴가나온 막내삼촌

어릴적 동네의 귀염둥이었던 나는 바람둥이 삼촌 따라 동네 다방은 단골로

드나들었던 기억이 있다

곱게 화장하고 한복 차려입은 마담이 늘 내게 볼뽀뽀를 해달라고했던 기억도 

나의 유년시절은 그렇게 서대문 네거리 부근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면서 자랐다.



막내오빠 인창중학교 졸업식




부모님과 6남매 중 아래로 삼남매와 사촌 향옥언니의 나들이




언니의 덕수 초교 졸업식

나를 빼고 우리 형제들과 삼촌들 고종사촌오빠들까지 전부 덕수초등학교

출신이다.

덕수초등학교 교직원이던 할마버지와 매점을 운영던 엄마

엄마는 할아버지와 아버지형제 6남매 엄마 형제 6남매 우리형제  6남매의

실질적 가장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우리엄마는 집안에서 늘 뜨개질을 하고 우리들 옷을 만들어 입혀주던

기억이 전부였지만 집안에서도 손을 놀리는 법이 없었고 당찬 사업가였다





둘째오빠의 대학교 고대 나들이

고모 태환할머니 엄마 그리고 나

경복중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여 엄마의평생 가장 큰 기쁨을 안녔던 둘째오빠의

대학교로 소풍을 갔다니

 

아버지의 퇴직금 실패로 서대문집을 처분해서 이사를 갔던 홍은동 문화주택시절의

사진은 거의 없다

아마도 살기 바빠서 사진 찍을 여유가 없었던 듯하다

망해서 이사간 홍은동 달동네 문화주택은 아마도 주택개량사업의 초기시절이었다

대지가 78평에 너른 앞마당과 입식주택이었다

단지 수도시설이 없어서 집안에 우물이 있던 우리집말고는 다른 집들은

 물지개장수에게 물을 사먹었던 시절

물지개장수는 뒷산 약수를 길어다 집집마다 팔았었다

 

홍은동 집이 다 좋으나 지대가 너무 높아  평지로 이사를 갔던 상도동집

집앞의 상도여중을 두고 버스로 세정거장거리의 봉천여중으로 추첨이 되어

봉천여중을 다녔다


지금은 아파트 숲으로 변했지만 참 정겨웠던 봉천여중

 



봉천여중 졸업식

서대문집을 떠나 홍은동집 이후 엄마는 쪽진버리를 자르고

옷도 간편한 복장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나므이 손을 빌려 살림을 살던 입장이 아니었기때문에

머리는 파마머리에 몸빼나 고무줄 치마에 브라우스를 입었어야 했다

그래도 졸업식날이라 한복에 고무신을 신은 엄마의 모습이 정겹다

 




막내숙모와 사촌들

우리집 근처에 살던 도순이 막내숙모와 동인이 동수

대학 휴학하고 직장 다니던 언니와 둘째오빠

 


 

초등학교 3학년ㅡ

그당시 유일한 티비방송국 KBS의 어린이 합창단에 나를 넣고싶었던 우리 엄마와 아버지

면접이 있었다 아버지 직업을 물었던 기억이다

나중에 들린 후문은 아머지 직업이 은행과장으로는 합격이 어려웠단다

대기업 부장 정도는 되어야했다는 이야기

 

내가 초등학교 6학년때 미국으로 유학을 간 큰오빠

서대문집앞에 우리나라 최초로 육교가 생겼고 큰오빠는 친구와 그 육교

가로등 앞에서 만나 늘 미국이야기를 나눈 기억이고 나는 귀로는 오빠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갑자기 밤이 낮처러 ㅁ환해지고 도로는 콘크리트로 바뀐 세상에

적응이 안되어 뛰쳐나온 땅강아지들과 놀았다

 

집안 형편상 대학교를 휴학하고 직장에 다니던 언니가 일찍 결혼을 했다

결혼 하자마자 남매를 낳았고 청담동이었던가 마당 넓은 단독주택에서

살때의 모습이다

 


 언니네 앞마당에서


친정 6남매의 둘째 시가 6남매의 맏며느리였던 엄마

엄마는 사업가였던 젊은 시절도 나중에 전업주부였던 시절도 늘 무언가를 했다.

뜨개질이던 바느질이던...

그러면서 나에게 늘 엄마의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남기고싶었던 마음이었으리라

내가 10살때 아버지의 퇴직금 사기로 집안이 망했어서

아주 어릴적의 풍족함은 한번도 못느끼고 자란 세월이었다


막내라 늘 나를 데리고 다녔던 엄마의 행보를 나는 많이 기억하고있다.

힘든 현실에도 마음속에 단단한 심지같은것을 지니고살았던 나의 엄마

나이가 드니 지금 내나이적의 엄마의 모습이 생각나고

그시설 엄마가 해주었던 음식들이 떠오른다.


대학다닐때 누군가가 돌렸던 설문지의 첫질문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 쓰기였는데

나는 '엄마' 라고 썼었다.

그걸 보고 아이들이 놀라던 모습도 생각이 나네


집안 대소사에 늘 술을 마시고 와서 집안을 엎어놓던 셋째 작은아버지앞에서도

엄마는 절대 기가 꺽이지 않았다.


삶이 고단하고 그동안의 부와 명예가 사라졌어도 한결같은 표정에 흐트러짐 없던

엄마의 모습과 조용한 카리스마에 지혜롭던 엄마의 삶의 태도가 참 좋았다.


이제는 내가 우리 아이들의 표본이 되고있다는 생각에 엄마생각이 더 많이 나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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